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斎宮歴史博物館 > 한국어 > 사이쿠 사전 > 대표적인 사이오

대표적인 사이오

오쿠노코조 (661–772)

 이세신궁이 국가수호의 신사가 된 계기는 672년에 일어난 내란 ‘임신(壬申)의 란’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내란은 고대 최대의 전쟁이며 새로운 천황을 결정하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싸움에 승리해 천황으로 즉위한 덴무 천황은 승리는 아마테라스 대신(大神)의 가호(加護)의 덕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아마테라스 대신(大神)을 모시는 이세신궁은 국가수호 신사의 위치가 부여되었습니다.
그 이세신궁에 종사한 자가 덴무 천황의 딸 오쿠노코조입니다. 그녀의 이름이 쓰인 목간(木簡)이 당시의 수도였던 아스카(나라 현 중부)의 유적에서 발견된 것으로 오쿠노코조는 가장 오래된 사이오로 확실히 실재한 사이오입니다. 반역의 의혹으로 죽음을 당한 남동생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노래가 일본의 가장 오래된 노래집 “만요슈(万葉集)”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노우에 내친왕 (717–775)

 8세기의 사이오이며 쇼무 천황의 딸입니다. 쇼무 천황은 나라의 도다이 사(寺)의 대불상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천황이며 신이나 부처님을 열심히 섬긴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가 사이오였던 시대에 쇼무 천황에 의해 사이쿠의 제도는 현저하게 정비되었습니다. 그녀는 사이오를 퇴임하고 수도에 돌아온 후 황족의 남성과 결혼합니다. 그 남편이 천황으로 즉위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이오 경험자 중에서는 유일한 황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쟁에 말려들어 천황을 저주해 죽이려고 했다는 의혹을 받아 황후에서 폐지되고 황태자였던 왕자와 함께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을 당했습니다. 또 그녀의 딸, 손녀도 사이오로 뽑혔습니다.

마사코 내친왕 (910–954)

 10세기의 사이오이며 헤이안 시대(8세기말∼12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천황의 한 사람인 다이고 천황의 딸입니다. 이복남동생이 천황으로 즉위했을 때 사이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사이오가 되기 전부터 연인이 있었습니다. 사이오는 미혼이 아니면 안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연인인 후지와라노 아쓰타다는 가인(노래를 잘 짓는 사람)으로 유명했으므로 그 노래집에는 마사코 내친왕과의 비통한 노래의 교류가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이오를 퇴임해 아쓰타다의 사촌형인 전도 유망한 귀족인 후지와라노 모로스케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당시 원래 사이오의 내친왕이 결혼한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마사코 내친왕 (1001–1022)

 마사코 내친왕은 11세기에 쓰인 역사이야기에 잘 나온 사이오입니다. 그녀의 아버지 산조 천황은 그 때의 권력자인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로부터 정치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시대의 사이오로서 꿈에서 본 이세신궁의 신의 탁선을 알리는 등을 하면서 아버지를 도우려고 했습니다. 사이오를 퇴임하고 수도로 돌아온 후 후지와라노 마사미치라는 귀족과 연애를 하지만, 아버지인 원래 천황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에 스스로 흑발을 잘라 비구니가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때 미치마사가 읊은 노래는 일본의 유명한 노래를 모은 13세기의 앤솔로지 “햐쿠닌잇슈(百人一首)”에 남겨져 있습니다.

요시코 여왕 (1005–1081)

 11세기의 사이오이며 당시의 천황과는 아버지끼리 사촌형제의 먼 친척의 사이오였습니다. 그녀는 20년 가까이 사이오를 맡고 있었는데 1031년에 이세신궁의 축제의 장소에서 그녀는 신탁이라고 말하면서 수도의 권력자들이 이세신궁을 경시하고 있는 것, 사이쿠료의 장관이 부정을 많이 하고 있는 것 등을 규탄했습니다. 사이오가 신탁을 말한 적은 그것이 처음이고 그 신탁은 수도에도 전해져 정치적인 대사건이 되었습니다. 전시실 Ⅱ에는 그녀가 신탁하는 모습을 그린 삽화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나가코 내친왕 (1030–1077)

 요시코 여왕 다음 사이오이며 당시의 천황의 딸입니다. 요시코 여왕에 의한 신탁사건에 대한 반성에서, 천황의 어린 딸이 사이오로 뽑혀 여러가지 기록이 남겨졌습니다. 영상작품 “사이오 군행(群行)”의 소재가 된 수도에서 이세를 향하는 5박6일의 사이오의 여행 기록도 그 하나입니다. 그 외에도 두 개의 그룹으로 갈라져 만든 와카(和歌)의 우열을 서로 경합하는 행사 ‘가이아와세(貝合)’ 등 사이쿠에서의 문화적인 활동의 기록 등도 있습니다.

야스코 내친왕 (1249–1284)

 13세기의 사이오이며 사이쿠에 온 최후의 사이오입니다. 12세기 후반 일본 전역적으로 일어난 내란 ‘겐페이의 전투’ 때에 사이오 제도는 일시 중단되었습니다. 그 후 부활했지만, 즉위해도 사이오를 바로 선택하지 않는 천황이나 사이오를 사이쿠로 파견하지 않는 천황도 나왔습니다. 그녀가 1272년에 사이오를 퇴임해 수도에 돌아온 것을 끝으로, 사이오는 뽑혀도 사이쿠에는 파견되지 않았습니다.

사치코 내친왕(태어난 해와 죽은 해는 불명)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은 가마쿠라의 무가정권을 타도하고 천황이 직접 정치하는 체제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는 그 상징으로 사이오 제도의 재흥을 도모하고 사이오를 사이쿠에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첫사랑의 왕비가 낳은 사치코 내친왕이 사이오로 뽑힌 것으로 사이오 제도에 대한 고다이고 천황의 기대가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다이고 천황의 신정권도 불과 3년으로 무너져 사치코 내친왕도 수도 교외에 있었던 사이오의 임시 궁전에서 퇴출했습니다. 그 후 천황은 정치적인 실권을 잃고 사이오가 다시 뽑힌 적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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