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斎宮歴史博物館 > 한국어 > 사이쿠 사전 > 사이쿠 Q&A

사이쿠 Q & A

Q1 : 사이오는 몇 명 있습니까?

Q2 : 최연소의 사이오는 누구?

Q3 : 최연장자 사이오는 누구?

Q4 : 재임기간이 가장 긴 사이오는 누구?

Q5 : 사이오를 퇴임한 후는 어떻게 하고 있었습니까?

Q6 : 왜 사이오는 미혼의 여성입니까?

Q7 : 사이오는 1명만입니까?

Q8 : 사이오(齊王)와 사이쿠(齊宮)는 뭐가 다릅니까?

Q9 : 현재의 이세신궁에 사이오는 없습니까?

Q10 : 사이오 제도가 왜 필요했어요?

Q11 : 사이오 제도가 폐절돼 버린 원인은 무엇입니까?

Q12 : 메이와초에 있는 사이오의 무덤에 대하여

Q13 : 왜 그 장소에 사이쿠가 두어졌습니까?

Q14 : 사이오를 모시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Q15 : 사이쿠에서는 특별한 규정이 있습니까?

Q16 : 사이쿠의 관리는 어디에 주거를 두었습니까?
지역이었습니다.


Q17 : “이세모노가타리” 이야기에 나온 사이오의 연애는 정말입니까?

Q18 : “겐지모노가타리” 이야기 중에 사이쿠는 등장합니까?

Q19 : 사이쿠 궁터의 발굴은 언제부터 시작했습니까?

Q20 : 사이쿠에서 고대의 길이 발견되었습니까?

Q21 : 왜 사이쿠에서는 기와를 발견 못합니까?

Q22 : 사이쿠 폐절 후 사이쿠가 있었던 장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Q23 : 전승상(傳承上)의 사이오란 무엇입니까?

Q24 : 사이오, 사이쿠에는 별명이 있습니까?

Q25 : 사이오는 샤먼이나 무당과 같은 존재입니까?


Q1 : 사이오는 몇 명 있습니까?
A1 : 60여 명입니다. 실재했던 것이 확실해 보이는 최초의 사이오인 7세기 후반 오쿠노코조(661-701)부터 14세기 전반의 사치코 내친왕(?-?)까지를 센 인원수입니다. 단 8세기 전반의 사이오에 대해서는 자료가 적기 때문에 여러가지 견해가 있어 정확한 인원수는 불분명합니다.

Q2 : 최연소의 사이오는 누구?
A2 : 다카쿠라 천황의 딸 이사코 내친왕(1176-?)입니다. 1177년에 사이오로 뽑혔을 때 1세였습니다. 그러나 1179년에 어머니가 타계했기 때문에 사이쿠에 온 적이 없이 퇴임했습니다. 그 시대의 사이오에 관한 자료는 적고 그 후의 동향은 불분명합니다.

Q3 : 최연장자 사이오는 누구?
A3 : 역사상의 사이오 중에서 최연장자 사이오는 고호리카와 천황의 누나 도시코 내친왕(1197-1251)입니다. 1226년에 사이오로 뽑혔을 때에는 29세였습니다. 31세로 사이쿠에 부임하고 천황의 양위까지 약 4년간 사이쿠에서 보냈습니다.

Q4 : 재임기간이 가장 긴 사이오는 누구?
A4 : 다이고 천황(885∼930)의 여동생 야스코 내친왕(892?-959)입니다. 897년에 사이오로 뽑혀 930년까지 34년에 걸쳐 사이오로 근무했습니다. 이세에 왔을 때는 899년, 사이쿠에서는 32년간 체류했습니다. 사이오의 재임이 장기간에 걸친 이유는 천황의 재위기간이 대단히 길었기 때문입니다.

Q5 : 사이오를 퇴임한 후는 어떻게 하고 있었습니까?
A5 : 사이오를 퇴임한 후 결혼한 사람은 지극히 적습니다(확실하게는 7명 결혼했다). 헤이안 시대에는 천황의 딸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퇴임한 대부분의 사이오는 조용히 여생을 보낸 것 같습니다. 그 중에는 퇴임한 사이오가 비구니가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Q6 : 왜 사이오는 미혼의 여성입니까?
A6 : 사이오는 몸을 깨끗하게 지키고 세상에서 격리되는 존재였습니다. 사이오가 신궁(神宮)에 가는 것은 년간 세 번뿐이지만, 사이쿠에 있어도 마음은 쭉 신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회 생활을 할 수 없었고 결혼도 할 수 없었습니다. 또 여성이 항상 사이오로 임명된 이유는 신의 아내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설(說)이나 천황이나 신 등의 귀중한 존재의 신변에는 여성이 종사한다는 규범에 근거한다 등의 설(說)이 있습니다.

Q7 : 사이오는 1명만입니까?
A7 : 9세기 초두 사가 천황의 시대에 현재의 교토시에 있는 수도의 수호신 가모 신사에도 사이오(가모의 사이오)가 뽑혔습니다. 가모의 사이오 제도가 13세기 전반에 폐절될 때까지 사이오는 2명이었습니다. 두 사이오는 모두 점(占)을 쳐서 황족의 미혼 왕녀 안에서 뽑았습니다.

Q8 : 사이오(齊王)와 사이쿠(齊宮)는 뭐가 다릅니까?
A8 : 사이쿠는 사이오의 궁전이라는 의미인데 사이오 본인을 부를 때에도 사용되었습니다. 또 가모의 사이오와 구별하기 위해 이세신궁에 근무한 사이오를 ‘사이쿠(齊宮)’, 가모 신사의 사이오를 ‘사이인(齊院)’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Q9 : 현재의 이세신궁에 사이오는 없습니까?
A9 : 없습니다. 사이오 제도는 14세기 전반에 폐절되었습니다. 그 후는 사이슈(祭主)가 신궁의 총책임자로 수도와 이세를 왕복했습니다. 사이슈는 8, 9세기에 시작된 신궁을 행정적으로 관할하는 역직이며 오나카토미 가문이라는 귀족의 일족 중에서 남성이 대대로 임명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근대국가가 성립된 후 남성 황족이 취임하는 역직이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세신궁이 민간의 종교법인이 되면서 기혼자인 이전 황족 여성이 임명되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슈가 사이오라고 오해받은 적이 있습니다.

Q10 : 사이오 제도가 왜 필요했어요?
A10 : 천황 가문의 선조신을 모시는 이세신궁과 궁정을 연결하는 존재 그리고 천황과 이세신궁의 신을 연결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필요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10세기 이후 수도의 화려한 문화를 이세에 알리는 살롱으로 이세신궁의 권위를 높이는 역할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Q11 : 사이오 제도가 폐절돼 버린 원인은 무엇입니까?
A11 : 사이오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고대 국가에 종교적인 권위를 주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9세기 후반 국가의 기구가 변질되기 시작하면서 재정도 불안정해지고 사이오 제도의 형식화가 시작되면서 13세기 천황의 정치적인 힘이 약해지는 동시에 점점 쇠퇴해 갑니다. 14세기 전반 고다이고 천황이 신정권을 수립한 후 그 상징의 하나로서 사이오가 중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정권은 단기간에 붕괴되고 사이오 제도도 폐절되었습니다.

Q12 : 메이와초에 있는 사이오의 무덤에 대하여
A12 : 사이쿠에서 돌아가신 사이오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974년에 타계한 다카코 여왕과 1172년에 타계한 아쓰코 내친왕입니다. 메이와초에는 궁내청이 관리하는 다카코 여왕의 무덤이 있습니다. 단 19세기에 인정된 것이며, 아주 옛 시대의 고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아쓰코 내친왕의 무덤도 전승지(傳承地)가 있는데 이 역시 고분인 것 같습니다. 장소를 가리키는 문헌상의 기록도 없기 때문에 정확한 무덤의 장소는 불분명합니다.

Q13 : 왜 그 장소에 사이쿠가 두어졌습니까?
A13 : 사이쿠는 이세신궁의 세력범위 서쪽 끝에 위치합니다. 또 수도에서 이세신궁에 이른 고대의 간선도로와 접해 있습니다. 설치의 이유를 기록한 문헌자료는 없지만, 여러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① 이세신궁에 갈 때 긴 거리를 행렬로 행진해서 사이오나 천황의 권위를 들어내기 위하여 ② 사이쿠와 이세신궁의 정치적인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이세신궁의 세력범위에서 가장 먼 곳에 두었다고도 생각됩니다.

Q14 : 사이오를 모시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A14 : T사이오의 신변에는 사이오의 비서 역할이나 신변을 돌보는 귀족신분의 여성, 서무 담당 궁녀 등 40여명의 여성들이 일했습니다. 사이쿠료에서는 26명의 남성 관료가 일했고 비상근의 직원이나 잡용 담당도 포함하면 남녀를 합친 총수는 520명. 지방의 서무 기관으로서는 대단히 큰 규모의 조직이었습니다.

Q15 : 사이쿠에서는 특별한 규정이 있습니까?
A15 : 사이쿠는 신을 모시는 사람이 사는 궁전이므로 항상 정숙함이 요구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더러운 물건에 접촉하거나 더러운 행위는 금지 되었습니다. 거기에 그것들을 의미하는 말에 있어서도 대용으로 말을 사용하도록 하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또 불교에 관한 말도 동일하게 규칙에 따라 취급되었습니다. 다음은 그 일부입니다.
죽다 낫다(생을 의미하는 반대어)
쉰다(병이 낫는 것을 의미하는 반대어)
땀(몸에서 나오는 것이며 더러운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
경전 물들인 종이(당시의 경전은 착색한 종이를 사용했기 때문임)
사원 기와지붕(사원은 기와지붕이었기 때문에 사이쿠의 건물에는 기와를 쓰지 않는다)
승(僧) 긴 머리의 사람(승은 머리를 깎고 있으므로 반대어)

Q16 : 사이쿠의 관리는 어디에 주거를 두었습니까?
A16 : 사이쿠의 서무 기관 인 사이쿠료는 격자장 구획 내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러한 구획은 오늘날의 관청가에 해당합니다. 관리들은 구획 외의 자택에서 출근했습니다. 아마 사이쿠 주변에 주택이 있고, 관리이나 그 가족이 생활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사이쿠와 그 주변은 수도를 제외하면 일본 전국에서도 유수의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었습니다.

Q17 : “이세모노가타리” 이야기에 나온 사이오의 연애는 정말입니까?
A17 : 10세기 전반 경에 성립한 문학작품의 “이세모노가타리” 이야기 중에는 미남의 귀족 아리와라노 나리히라(825-880)로 보이는 주인공 남자와 사이오의 연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때의 사이오는 세이와 천황의 누나 야스코 내친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남자는 천황의 사자로 사이쿠를 방문했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남자가 실재한 아리와라노 나리히라인지, 두 사람의 연애는 진실인지 창작인지, 나리히라가 실제로 이세로 왔는지, 등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의가 거듭되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10세기 말기 경에는 사실로 믿었던 것 같습니다.

Q18 : “겐지모노가타리” 이야기 중에 사이쿠는 등장합니까?
A18 :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고전문학 “겐지모노가타리” 이야기 중에는 주인공의 히카루 겐지 보다 나이가 많은 연인 로쿠조노 미야수도코로라고 통칭되는 여성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죽은 황태자의 아내이며 딸이 사이오로 뽑힌 것을 계기로 딸과 함께 이세에 내려가 히카루 겐지와 헤어졌습니다. 딸의 사이오는 퇴임하고 귀경한 후 히카루 겐지의 후원을 받아 황제의 왕비가 됩니다. 그리고 사이오였던 왕비라는 의미로 사이쿠노뇨고라고 불렸습니다. 로쿠조노 미야수도코로와 딸의 사이오는 실재한 사이오이며 다이고 천황의 손자이자 후에 무라카미 천황과 결혼한 요시코 여왕(929-985)을 모델로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녀도 사이쿠노뇨고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Q19 : 사이쿠 궁터의 발굴은 언제부터 시작했습니까?
A19 : 1970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쯤 일본은 고도성장기였고 지금의 사이쿠 역사박물관 남측에 주택단지를 개발할 계획이 있었는데 그 사전조사 과정에 8세기 유적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후 조사범위를 확대하자 큰 도랑이나 건물터, 특별한 벼루, 빨갛게 칠해진 도바(土馬)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환상으로 여겨지던 사이쿠의 존재가 확실해졌습니다.

Q20 : 사이쿠에서 고대의 길이 발견되었습니까?
A20 : 사이쿠의 유적 중에 양측에 측도랑을 가진 직선도로가 개통되어 있었음이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그 규모는 노면의 폭이 7.8m로 보고 있고, 현재의 2차선 도로 정도나 있었습니다. 그 길은 수도와 동일본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에서 분기되고 이세신궁에 이르는 길의 일부분이며 현재의 고속도로 처럼 가능한 한 직선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 길은 천황의 사자가 이세신궁으로 향하는 길, 사이오가 수도에서 오는 길, 사이오가 이세신궁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사적 내에서는 일부를 ‘고대 이세도(道)’로 복원해 두었습니다.

Q21 : 왜 사이쿠에서는 기와를 발견 못합니까?
A21 : 기와는 불교와 함께 일본으로 수입된 건축 재료입니다. 사이쿠의 제도가 정비된 8세기에 기와는 사원이나 서무 기관의 건물에서 사용되었는데 천황의 궁전에도 주택 부분에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사이쿠는 궁전이며 서무 기관이지만, 불교적인 것을 피하고 또 천황의 주거를 본받아 기와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Q22 : 사이쿠 폐절 후 사이쿠가 있었던 장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A22 : 발굴조사로는 그 지방에서 일반적인 토기 등이 출토되었고, 주변과 변함없는 농촌적인 경관이 펼쳐졌던 것 같습니다. 에도 시대에는 서민의 이세신궁 참배가 붐이 되고 사이쿠는 숙소 마을로서 기능했습니다. 사이쿠와 관계된 땅의 이름이 남아있었던 것을 당시의 지지(地誌)를 봐도 알 수 있고 옛날에 사이쿠가 있었던 곳으로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Q23 : 전승상(傳承上)의 사이오란 무엇입니까?
A23 : 실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사이오인 오쿠노코조(661-701)보다도 이전 시대에 이세신궁의 신을 모셨던 왕녀들이 있었던 것으로 “니혼쇼키(日本書紀)” 등의 문헌에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의 실재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전승상(傳承上)의 사이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야마토히메노미코토는 이세신궁의 신이 안주할 곳을 찾아 신과 함께 각지를 돌고 현재의 이세신궁의 장소에 겨우 도착한 것으로 유명한 왕녀입니다.

Q24 : 사이오, 사이쿠에는 별명이 있습니까?
A24 : 일본의 한자는 중국식으로 읽는 법과 일본식으로 읽는 법이 있습니다. ‘사이오’, ‘사이쿠’는 중국식으로 읽는 법입니다. 그것을 일본식으로 읽으면 ‘사이오’는 ‘이키쓰노히메미코’, ‘사이쿠’는 ‘이쓰키노미야’라고 읽습니다. 현재 이쓰키노미야 역사체험관 등 사이쿠 궁터에 있는 시설에 ‘이쓰키노미야’라고 하는 단어가 쓰여 있는 이유는 고풍이며 격조 높은 이미지가 있는 일본식의 읽는 법을 채용했기 때문입니다.

Q25 : 사이오는 샤먼이나 무당과 같은 존재입니까?
A25 : 사이오는 신에 종사하는 역할의 여성이지만, 예언이나 신탁 등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기대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 점은 무당이나 샤먼과 크게 다른 점입니다. 또 사이오는 기도하거나 신을 제사지내는 일의 진행역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신관이나 사제와 같은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사이오는 이세신궁의 일상적인 제사에는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제사에 가장 숭고한 존재로서 참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이오는 천황 대신 구체적인 기원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이오는 이세에 있는 것 자체에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이오는 뭐 때문에 이세에 있었을까요?
사이오의 특징으로서 천황 1대에 한 사람만 임명됩니다. 사이오는 수도를 쉽게 떠날 수 없는 천황 본인의 대리로서, 이세의 신을 모시는 역할을 사이오에게 기대했던 것입니다. 사이오는 천황의 수호신인 이세신궁의 신에 대하여 천황이 보여주는 성의의 표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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